아이, 그 모든 유일한 순간
심리치료학과 1학년 양정아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
어느 부모든 아이들을 키울 때 초보로 돌아간다.
몇 명을 키워냈든 공부를 잘했든 상관없다. 분명히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판 남인 것처럼 느낄 때마다, 간절히 도움을 청
하거나 외면하게 마련이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가
르치면서 만난 아이들 중 똑같은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 달랐다. 이 아이는 이렇고 저 아이는 저
럴 것이라는 세상의 편견은 점차 내 안에서 허물어
져갔다. 특히 사람들이 괜히 걱정하고 무시하는 아
이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만났던 아이
중 한 명은 자폐를 앓고 있었지만, 음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음악으로 멋
지게 풀어낼 줄 알았다. 이후 나는 달크로즈 유리
드믹스, 오디에이션, 오르프 등 여러 유아 음악 교수법들을 배우러 쉴 새 없이 돌아다
녔다. 덕분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현재 유아 교육기관을 5년 째 운영하게 되었다.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아이들의 잠재력을 키워주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애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주치는 몇몇 아이들이 있었다. 시선을 맞추기 어렵거나 대화가
되지 않고, 소근육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거나 걸핏하면 친구들과 싸우는 아이들, 수
년간의 경험 덕분인지 나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이들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고 도와줄 수 있을지 구
체적인 방안을 찾기 어려웠다. 난처하고 까다로운 문제인 만큼 모른 척 하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노력과 정성, 진심 어린 말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조심한들 부모님들은 자신의 소
중한 아이를 바보 취급 했다며 노발대발하거나 상처를 받게 마련이었고, 나 역시 마찬
가지로 아파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태도로 방관하는 대신 나는 방안을 찾아 나섰다. 오
해와 외면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괴로워하는 부모님들을 위해서 심리치료
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평생 학생
사회인들은 보통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사이버대학을 택한다고들 한다. 아마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학교를 오가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절약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
에 평생 교육사 자격증을 따려고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었을 때, 제대로 공부하기 위
해서는 현장에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입학하기 전
불처럼 타올랐던 의지는 이내 숙제와 발표, 그리고 중간고사를 지나면서 차차 사그라
들었다. 체력 때문이었다. 원체 뭐든 전력을 다해 하는 만큼 일에서도 공부에서도 소
홀해질 수 없었다. 목요일 수업까지 신청해서 욕심껏 들으면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아이들을 빠짐없이 챙겼다. 그러다 보니 쉴 시간은 줄어들었고 결국 몸살이 왔다. 하
지만 40도가 넘는 고열에도 수업은 들어야 겠다 싶어서 부득불 출석을 했다. 결국 그
다음날 병가를 냈다.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말마따나 공부는 평생 하는 것
이고, 심리치료학과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버텨야 했다. 학위
뿐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해 곤경에 처한 아이와 부모님들에게 좀 더 전문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순식간에 타버리고 사라지는 불이 아니라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더라도 끈질기게 타는 불씨가 필요했다. 일과 공부, 그리고 생활을 배분해 이어나가
야 했다. 그래서 우선 건강을 위해 오 분, 십 분씩 차차 늘려가면서 걷기로 했다. 무리
하게 신청했던 수업들도 눈물을 머금고 취소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마따나 피곤하다
는 핑계로 언제든 그만두거나 흐트러질 수도 있지만, 평생 학생이 되기로 결심한 만큼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계속 작심할 생각이다.
스트라이크도 홈런도 휘둘러야 온다
심리치료학과를 전공하고 직접 가서 강의를 수강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대학 입
시는 순탄치 않았다. 당시 재해로 인해 면접 일정이 불가피하게 미뤄진 데다 정시 접
수 일자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어영부영 넘겨 버렸다.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싶었던 찰나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추가 모집, 메시지를 받은 당일 네 시
가 마감이었다. 낙담조차 잊어버리고 사무실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일사천리로
접수한 결과, 합격이었다. 나중에야 합격보다 더 어려운 게 수업들과 과제, 중간고사
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다는 아니더라도 점차 알아듣기 시작하게 된 부동산학 수업과
끈기로 쓰는 글쓰기, 그리고 전공 교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세미나를 들으면서 학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나 수업을 듣기 전에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위하
는 마음은 끔찍했지만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고민하거나 서로 상처를 주고
받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세미나 수업에서 교수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난후, 아이에 대
해 좀 더 신중하게 관찰하고 부모님들에게 단순히 지적하는 게 아니라 함께 아이를 위
해 이겨나가자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다. 부모님들은 상처받기는 했지만, 대
신 이전에는 막막하고 슬프기만 했다면 이제는 희미한 희망이라도 느낄 수 있다고 말
씀해주셨다. 이전의 나라면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삼십대라는, 아마추어도 프
로도 아닌 나이에 서 있던 나는 삶을 바꾼다는 건 섣부른 오판에 의한 것이거나 으레
후회가 잇따르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공에 맞기 싫어서 덜덜
떨면서 피하거나 눈치만 보는 대신, 일단 쥐고 있는 배트를 있는 힘껏 휘둘러야 한다.
설령 스트라이크일지라도, 홈런 역시 배트를 휘두르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하니까.